코로나 19 이후에 긴급사태와 자택근무와 사회 거리두기 운동이 일상생활이 되였기에 사람들을 만나서 담소를 나누는 것도 조심스러운 때이다. 이러한 때에 2020도쿄 올림픽대회(2021년7월23일-8월8일)가 무사히 마치게 된 것은 일본 정부관계자와 일본 국민이 하나된 승리의 결과로 본다.
도쿄 올림픽 이후에 앞으로 동북아에서 한반도 통일이 앞으로 큰 이슈가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인접국가끼리 역사적으로 민감한 일들을 극복하며 나아가기 위한 것들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우연히 읽은 책
최근에 구입해서 읽는 책은 카운트다운・멜트다운(후네바시 요이치) 책을 읽었다. 그 책의 내용은 2011년3월11일 14시46분경에 일어난 히가시일본대신사이 때 일어난 사건 중에 후쿠시마를 중심한 원자로가 자동정지됨으로 이 대처방안을 정부와 동경전력과 근무자들의 대처하는 모습을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이 기록을 읽는 가운데 그 때 아픔이 고스란히 떠 오른다. TV를 보며 이시마끼에 근무하시는 선교사 조강래 친구가 걱정이 되어 전화를 하였으나 불통이 되었다. 몇일 지난 뒤에 의료봉사차원의 센다이로 가는 일심병원의 차로 동승하여 갔다. 그때 조강래 친구를 만나서 얼마나 반가운지도 몰랐다 그때 친구는 인근의 지역에 가정연합 신자 집에 방문하다가 쯔나미가 와서 자동차로 산으로 도주하여 살았다고 한다. 만약에 고속도로를 이용했다면 이세상에 없었을 거라고….
역사를 살펴보자
우리 나라는 강대국에 둘러 쌓여서 우리 자체가 무언가 해결한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 같다. 지금 대한민국은 4대강국에 둘려 쌓여 있는 지정학적 위치를 부인할 수 없다.
고려 2차 침입도 원과 명과의 나라 교체의 후폭풍이고, 임진왜란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에 간다는 명분으로 일어났고, 명이냐 후금이냐 하는 논쟁하는 사이에 후금의 침입인 정묘효란이 있었고, 청나라가 조선을 침입한 병자호란이 있었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속에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한반도에 일어난 전쟁은 주변국 힘의 균형이 깨어지며 일어난 전쟁이라고 본다.
이러한 상황이 동북아에서 재현될 가능성이있고 미・중 패권싸움을 중심으로 인접국가와 긴장관계가 형성될 때 일어난다고 본다. 우리 대한민국이 앞으로 중시해야 할 것들은 강대국 나라의 피해를 덜 받는 선택과 외부정세에 둔감에서 민감으로해야 할 것과 지배층의 부정부패에서 벗어나 누구나 공감하는 나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염려되는 조국의 소리
‘소련은 해방군, 미군은 점령군’이라는 단어가 조국에서 들려오는 이 때에 우리가 한 번 살펴보아야 할 것이 무엇일까?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내내 정권에 맞섰던 민주화 운동 인사인 咸錫憲 선생이 <씨알소리>1971년 11월호에 ‘내가 겪은 신의주 학생사건’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함 선생은 반공 시위인 신의주 학생 시위의 배후자로 지목되어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1947년 3월17일 월남했다고 한다.
신의주 학생사건의 원인 1945년 12월29일자 소련 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다.
<심지어 낮에도 길거리에서 술에 취한 공무원들을 볼 수 있다. 밤만 되면 모든 여관이며 공창(신의주에 70 곳이 넘는다)마다 술잔치가 벌어진다. 취한 군관들은 바로 거기서 순찰중인 경무부대원(군사경찰・헙볍)들의 묵인하에 병사들과 교대로 창녀를 찾는다. 신의주에 주둔하고 있는 비행사단의 개별성원(정치부장 추니크 중좌)도 이런 온갖 추태스런 품행을 보이고 있다. 소좌(소련) 테미도프가 지휘관으로 있는 현지 보병연대 군무원들 역시 이에 뒤떨어지지는 않는다. 데미도프는 토요일 아침부터 다음 날 저녁까지 이틀 동안(12월8일-9일) 그에게 별도로 제공된 경무사령부 여관방 두 개에서 계속 창녀들과 술잔치를 벌였다.
(…) 회의 참석차 이틀 일정으로 평양으로 떠난 기르코 대신 자리를 지킨 부사령관 표도르프 소좌는 이틀 동안 술에 취해 사령부에 나타나지 않았다. 사령부에는 당직 사관만 남아 있었고 심지어 군관조차 한명 없었다. 고주망태가 된 표도로프와 군관들을 우리는 이틀째 되는 날 집에서 발견했으며, 경무사령부의 나머지 군관들의 소재는 파악할 수 없었다. (…) 그런 상황은 바로 최근 신의주에서 있었던 조선 민족주의자들의 시위의 일부 원인을 설명하고 있다.>
미군의 포고령의 일부분이지만 살펴보자.
<점령의 목적은 (일본이 조인한) 항복문서를 이행하고 (조선 인민의) 그 인간적・종교적 권리를 확보함에 있다…조선 인민의 오랫동안의 노예상태와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해방, 독립시키라는 연합국의 결심을 명심한다.>
이 두 문서의 내용을 보더라도 ‘소련군은 해방군, 미군은 점령군’이라는 말은 성립이 되지 않는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국력이 세계10위권 안팎으로 드나 드는 것은 미국과 우방관계와 자유 민주주의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국가와 민족에 대해서 생각해 외교관계를 선택하지 않으면 구한말시대가 재현이 된다고 본다. 우리 조국이 세계10대 무역국으로 성장하게 도와준 나라들에게 감사와 더불어 더욱 튼튼한 동맹국으로 가야한다고 본다.
통일은 이웃나라와 함께해야 가능
아픈 역사 가운데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일본 본국을 제외한 아시아 최대의 공업국이 만주였다는 것이다. 이 동북지역은 제조업 분야에서 1970년대까지 전국의 20%를 차지하여 상하이와 함께 중국 경제의 대표적인 지역이었다.
소련의 공업화가 나름 궤도에 오른 것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레닌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직후 급속한 공산화 정책으로 공업 생산력이 무너졌다. 1924년 레닌이 사망 이후 스탈린이 정권을 잡은 후에 1928년 10월부터 5개년 개혁을 하여 공업화와 농업의 진흥정책을 펴도 효과는 없었다.
그런 소련이 1945-59년에 놀라운 공업국가 된 것은 두 가지의 원인으로 볼 수 있었다. 소련은 전후 점령지인 독일의 우수한 인적 자원이 소련의 발전의 큰 도움이 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소련은 북한에서 전리품으로 수풍댐 수련발전소의 설비를 반출하여 간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런 것을 보면 국가와 민족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민족은 자국에만 사는 것이 아니라 세계 각국에 흩어져서 산다. 그런데 자국이 왜소하거나 없어진다면 배달민족이라고 과연 자랑할 수 있을까!
평화통일연합이 해야 할 일은?
일본과 한국이 자매결연한 도시가 165개나 된다고 한다. 이 의미는 정부와 언론이 뭐라고 표현하여도 경제공동체로서 함께 가야 할 나라인 것이다. 그리고 통일이 되면 한국만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자유왕래가 보장되기 때문에 납북문제의 진실 공방도 해결되고 함께 지하자원개발과 더불어 저 시베리아까지 동북아평화의 모델을 만들 수 있는 공생・공영・공의의 가치를 나눌 때가 되었다고 본다.
이제야 한・일이 함께 추진할 수 있는 운동으로서 일한터널과 평화공원을 조성하여 기초적으로 가치의 공유를 하며 대화합하는 운동이 펼쳐지게끔 일익을 담당할 때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