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국에서 문선명 총재님의 7주년 성화식에 참여하였다. 그 식은 ‘선물’이란 주제로 진행되었다. 그 행사의 백미는 지난 7년 동안 본향원(묘지)에서 1000일 동안 시묘생활을 잘 보내시었고, 우리에게 말 못할 여러가지를 문 선명 총재와 대화를 나누며 우리를 지도해 주시었던 것을 편지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평화통일회원 여러분들께서 한 총재님의 심정과 함께 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참어머님께서 참아버님께 보내는 서신
사랑하는 아버님! 그리운 아버님! 언제나 함께하는 아버님! 아버님께서 천상에 입성하신지도 7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 천주에 당신께서 흘리신 땀과 눈물이 베어있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오늘 유독 그립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성화하기 1년 전 90세를 훌쩍 넘긴 연세에도 여덟 차례 넘게 미국을 왕래했습니다. 자신의 건강을 전혀 돌보지 않으시고, 오직 세계와 인류를 위해 일하셨습니다. “이 일을 끝내고 한가해지면 그 때 우리 조금 쉽시다.”라고 하시던 말씀은 끝내 지상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밤낮을 쉬지 않고 일하신 당신, 그래서 저도 그런 아버님을 모시고 생활하며 일평생 3시간 이상을 자본적이 없었습니다.
2012년 뜨거운 여름, 마지막 병원에 입원하실 때도 아버님께서는 “아직 할 일이 많은데 병원에 서 시간만 보내면 어떡하나!”하시며 오히려 입원을 권유한 사람들을 나무라셨지요.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셨지요. 그리고 아버님께서는 “오늘은 엄마하고 겸상을 하고 싶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우리 식구들은 참으로 의아했습니다. 항상 제가 옆에 앉아 함께 식사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날 점심상을 앞에 두고 아버님께서는 숟가락을 들 생각은 하지도 않고 제 얼굴만 빤히 바라보았습니다. 아마도 아버님께서는 마음속에 제 얼굴을 새기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미소를 지으며 아버님 손에 숟가락을 쥐여드리고 반찬을 올려드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드시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습니다. 저도 아버님의 얼굴을 가슴에 새겼습니다.
그리고 유독 태양빛이 강한 다음 날, 아버님께서는 한 키가 넘는 커다란 산소통을 대동하고 따가운 햇빛을 받으며 청평호수와 청심중고등학교 시작으로 청평단지를 두루 둘러보셨습니다. 그리고 천정궁으로 돌아와 “하늘이여 축복하소서. 끝을 맺게 허락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라는 기도 후, 녹음기를 가져오라 하시고‘복귀섭리의 사명을 다이루었다.’라는 마지막 기도를 저와 함께 올리셨습니다.
그리고 “엄마, 고마워요! 엄마, 잘 부탁해!”,
아버님께서는 힘겨워하면서도 ‘너무 미안하고 정말 고맙다’고 연이어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아버님의 손을 더욱 굳게 잡으며 다정한 말과 눈빛으로 안심시켜 드렸습니다.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님께서는 그렇게 하늘부모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그리고 천성산 기슭 본향원에 잠드셨습니다.
아버님 성화 후 새벽이면 저는 본향원에 올랐습니다.
가을이 되면 폭풍이 몰아치고, 겨울이 되면 함박눈이 쏟아져 쉬어야 할 이유와 핑계는 참으로 많았지만 어김없이 새벽이면 본향원에 올랐습니다. 성화 후 40일 동안 아침저녁으로 조식을 올렸고, 아버님이 그리울 때면 수없이 본향원을 오르내리며 아버님과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버님의 생각이 제 생각이 되었고, 제 생각이 아버님의 생각이 되었습니다.
햇볕이 따스한 날, 바람이 부는 날, 갑자스레 천둥번개가 치고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 함박눈이 하늘을 새까맣게 덮는 날… 그럼에도 저는 아버님 성화 후 1,095일 동안 한 번도 시묘를 거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970년대 아버님께서 걸으셨던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뉴욕까지 5,600 킬로미터를 횡단했고, 아버님과 함께 올랐던 알프스 산맥의 12개 봉우리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당신과 약속했던 “초창기 교회로 돌아가 신령과 진리를 교회를 부흥시키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성화 3주년, 저는 이제 아버님께서는 그 동안 외로우셨던 하늘부모님을 본향원에서 위로해드리시고 송영의 대상으로 자유로와지시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리고 아버님을 위해, 그리고 하늘부모님을 위해 2020까지 7개국 국가복귀를 승리할 것을 결의했습니다.
동에서 서로, 남에서 북으로, 저는 미친 듯이 세상을 품으려 다녔습니다. 입안이 헐고, 다리가 붓고, 서있을 수조차 없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저는 쉴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님과의 약속, 아 무리 뜻이 힘들어도 내 대에서 끝을 보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기필코 제가 이뤄 드리겠다. 그것을 위해서 저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라며 수없이 다짐하며 살아왔습니다. 당신이 사무치게 그리울 때면 달을 벗삼아 대화하며 아버님의 성체를 앞에 두고 제가 했던 약속“생이 다하는 날까지 천일국을 이땅에 정착시키겠다”는 그 결의를 되뇌이며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살다보니, 벌써 성화 7주년이 되었습니다.
아버님 아시지요. 아버님 성화 이후에는 참으로 형언할 수 없어, “나만 남았나이다”하는 입장이었습니다. 마치 황막한 사막에 모레 태풍이 불어오는데 눈을 뜰 수 없는 환경에서 작은 바늘 하나를 찾아야만 하는 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찾았습니다. 찾아야만 했습니다.
“2020까지 7개국을 반드시 복귀하겠다.”는 저의 결의는,
“모든 축복가정을 신종족메시아로서 천보에 입적케하겠다.”는 저의 결의는, 아버님을 위한 제 선물입니다. 이 선물이, 하늘부모님에 대한 당신의 효정의 삶이 온누리에 희망의 빛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버님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일본어는 여기서.